한 세기 이상 생명과학은 자연을 해석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축적된 지식의 총체였다. 유전자, 단백질, 세포 구조 등은 과학자의 눈과 실험으로 천천히 해석되어 왔고 우리는 그 복잡한 생명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흐름에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인공지능(AI) 이라는 새로운 해석자 새로운 직관의 등장이었다.
인간이 수십 년을 들여 밝혀낸 단백질의 구조를 단 몇 분 안에 예측해내고 인간이 놓친 생체 내 상호작용의 패턴을 스스로 학습하여 이해하는 이 AI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AI는 인간이 보지 못한 것을 느끼고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예측하는 제3의 관찰자로 생물학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1. 복잡함 속 질서를 찾는 눈 생명 현상의 패턴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복잡하다. 너무나 복잡해서 모든 것을 수식으로 설명하거나 실험으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세포 하나 속에도 수천 개의 단백질, 수많은 유전자, 복잡한 대사 경로가 얽혀 있다. 이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작동하며 생명 현상을 유지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패턴이다.
생명 시스템은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일정한 규칙성과 반복성을 가진다. 특정 유전자의 발현은 특정 조건에서만 나타나고, 특정 단백질의 결합은 특정 구조에서만 가능하다. 이 반복적인 규칙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 바로 ‘패턴 분석’이다. 과거에는 이런 패턴을 인간이 오랜 실험을 통해 도출해왔다. 그러나 데이터가 수십억 개에 달하고 그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인간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찾아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가 등장했다. AI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반복을 찾아내는 데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딥러닝 기반의 모델은 복잡한 관계 속의 미묘한 상관성까지 포착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 분석 도구로는 찾아낼 수 없었던 생물학적 패턴을 감지해낼 수 있게 되었다.
2. AlphaFold의 충격 그리고 예측의 새로운 시대
2020년 전 세계 생명과학계는 하나의 발표로 충격에 빠졌다. 딥마인드의 AlphaFold가 단백질 접힘 문제를 AI로 해결해냈다는 소식이었다. 단백질은 그 아미노산 서열에 따라 특정한 3차원 구조를 형성하는데 이 구조가 바로 단백질의 기능과 작용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떤 서열이 어떤 구조를 만드는지 예측하는 것은 생명과학계 최대 난제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AlphaFold는 이 문제를 기계학습을 통해 해결했다. 기존에는 실험으로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던 단백질 구조 예측을 AI는 몇 분 안에 정확히 예측해냈다. 그것도 수천 개에 달하는 단백질에 대해서 말이다. 그 정확도는 인간 전문가와 대등하거나 때로는 능가하기도 했다. 이후 공개된 AlphaFold 데이터베이스는 수백만 개의 단백질 구조를 담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 실험 없이도 새로운 연구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AlphaFold는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그리고 최근 등장한 다양한 모델들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더 넓은 범위의 생체 분자 예측에 도전하고 있다. 어떤 모델은 단백질-리간드 결합을 예측하고 어떤 모델은 RNA의 3차원 구조까지 그려낸다. 이들은 모두 AI가 가진 직관적 패턴 분석 능력을 극대화하여 인간 과학자들이 놓쳤던 관계와 구조를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3. AI는 어떻게 인간보다 더 생물학을 ‘이해’하는가
AI가 인간보다 생물학을 이해한다는 말은 다소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연구 현장에서는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한다. 그 이유는 AI가 이해하는 방식이 인간과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로 선형적 사고와 실험 기반의 귀납적 방법을 통해 지식을 쌓아간다. 반면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병렬로 처리하면서 통계적 상관관계와 비선형적 패턴을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AI가 가진 ‘비인간적 직관’이다.
예를 들어 인간 과학자는 두 단백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고 그 기전을 설명하기 위해 수십 번의 실험을 설계한다. 하지만 AI는 두 단백질 사이의 서열, 구조, 결합부위에 대한 데이터를 수천만 개 학습하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인식해 단숨에 예측한다. 그리고 이 예측은 종종,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실제로 AI는 단백질 간 상호작용뿐 아니라 세포 내 신호전달 경로 약물 후보 물질의 타깃 예측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 등에서 새로운 연결고리를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계산이 빠르다는 수준을 넘어서 ‘지금껏 몰랐던 생명 시스템의 법칙’을 제안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AI가 생명과학의 연구 방식을 바꾸고 있다. 실험 중심에서 예측 중심, 데이터 기반에서 패턴 기반, 그리고 인간 직관에서 기계 직관으로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연구자들은 실험을 통해 하나의 가설을 검증하기보다 AI의 예측을 기반으로 가설을 설계하고 실험을 ‘검증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변화는 연구 속도와 범위를 비약적으로 넓히고 있다. 예전 같으면 1년 걸릴 일이 이제는 일주일 만에 예측되고 글로벌 연구자들은 AI가 제시한 구조를 기반으로 신약을 설계하거나 질병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있다. AI는 새로운 연구자가 되었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분석가로 기능하고 있다.
물론 AI는 만능이 아니다. AI가 제시한 예측은 언제나 검증이 필요하며 예측 결과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AI는 생물학을 단순히 돕는 도구를 넘어서 동등한 동료이자 협력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맺으며 인간의 지혜와 AI의 직관이 만날 때
생물학은 이제 단순히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데이터의 바다에서 패턴을 찾고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읽어내는 지능의 싸움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AI는 인간이 미처 보지 못한 규칙을 발견하고 우리가 던지지 못한 질문을 먼저 제시한다.
우리는 이제 AI와 함께 생명의 비밀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의 과학적 호기심과 AI의 패턴 분석 능력이 결합될 때 생명과학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AI는 단순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